3손가락 커브의 달인, 모데카이 브라운
"내가 만약 정상적인 손을 가진 투수였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선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모데카이 브라운-
부상은 아마도 모든 운동선수에게 그렇듯 야구선수에게도 매우 위협적인 존재일 것이다. 특히나 매일같이 공을 던져야하는 투수에게 그것도 공을 던지는 손에 치명적인 부상이 있다면 더이상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수에게는 이런 치명적인 부상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심지어 손가락이 아예 없는 경우에도 말이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팀이자 많은 팬들을 갖고 있는 시카고 컵스(Chicago Cubs)는 모두들 알다시피 가장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하고 있는 팀으로 유명하다. 100년이 훌쩍넘는 팀 역사에도 불구하고 1903년부터 시작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은 1907년과 1908년 달랑 2번이다.
그런데 그 유구한 역사속에 유이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룬 주축선수들중에 손가락 하나가 아예 없는 투수가 있었다. 당시 시카고 컵스의 에이스이자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커브를 던진 것으로 알려진 그 선수는 바로 "모데카이 브라운" (Mordecai "Three Finger" Brown) 이다.
<모데카이 브라운과 그의 비틀어진 손가락>
1876년 미국 인디애나주 내슈빌에서 태어난 모데카이 브라운은 (Mordecai Centennial Brown) 5살때 치명적인 사고를 당해 검지손가락을 잃었다. 게다가 이듬해 낙상으로 인하여 남은 손가락들마저 골절되었고 그의 오른손 손가락 중 멀쩡한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소년 모데카이 브라운은 손가락 장애에도 불구하고 별탈없이 자랐고 10살때부터는 다른 아이들처럼 야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탄광에서 일을 해야했던 모데카이 브라운은 주말에 틈틈이 지역야구팀에서 3루수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선발로 예정되었던 선수가 경기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임시로 투수로 출전하게 된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투수로 야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앳띤 모습의 모데카이 브라운>
드디어 1903년, 당시로는 매우 늦은 나이인 26세였지만 브라운은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소속팀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데뷔 첫 해, 9승 13패, ERA 2.60 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카디널스는 얼른 그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 해버렸다. 손가락이 하나없는 그에게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듯 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모데카이 브라운은 자신의 주무기인 커브의 낙차뿐만 아니라 제구까지 완성하고 있던 중이었다.
1904년 컵스로 이적한 첫해, 드디어 커브 제구를 완성한 모데카이 브라운은 15승 10패, ERA 1.86 의 성적으로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하게 된다. 1905년 6월. 그의 일생일대의 라이벌이 되는 뉴욕 자이언츠의 크리스티 매튜슨과 대결에게 노히트노런을 당했다. 절치부심한 브라운은 이어진 리턴매치에서 8 :1 로 승리했으며 이후 크리스티 매튜슨과의 대결에서 9연승을 거두었다.
1906년은 시카고 컵스와 모데카이 브라운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시즌초반 중위권에 머무르고 있던 컵스는 여름의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대반격에 들어갔고 그 결과 7월이후 80승 16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 1906년 기록한 단일시즌 116승 (승률 0.763) 은 여전히 MLB 단일시즌 최다승이며 95년이 지나서야 타이기록이 한번 나온 불멸의 대기록이다.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
당시 브라운의 성적은 36경기 26승 6패, ERA 1.04로 30세에 가까운 나이에 드디어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거듭나게 된것이다. 다만 월드시리즈에서 같은 지역팀인 화이트삭스에게 패배한 것이 한가지 흠이었지만 브라운에게는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모데카이 브라운은 6년연속 20승을 달성했으며 1907년, 1908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상대는 모두 타이 콥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1908년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있는 모데카이 브라운>
1906년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2 : 0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던 모데카이 브라운은 1907년 월드시리즈 리턴매치에서도 2승을 거두며 컵스의 2년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다만 이것이 컵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다.)
모데카이 브라운이 활약하는 동안 4번의 NL 우승과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록한 시카고 컵스는 1913년 브라운이 이적한 후에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후....100년이..) 1909 시즌 종료후 쿠바의 휴양지로 휴가를 다녀온뒤 알수없는 병에걸린 모데카이 브라운은 계속된 의사의 은퇴권고에도 계속 팀을 옮기며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1916년 9월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있는 모데카이 브라운>
1916년 40세의 모데카이 브라운은 선수생활을 마지막을 장식하기위하여 잠시 친정팀인 시카고 컵스로 복귀했다. 그리고 1916년 9월 4일, 당대 최고의 투수들이자 라이벌이었던 모데카이 브라운과 크리스티 매튜슨 모두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미 크리스티 매튜슨은 신시내티 감독으로 계약까지 한 상태. 아쉽게도 투수전은 아니었지만 경기는 매우 치열했으며 난타전 끝에 크리스티 매튜슨의 신시내티가 10 : 8로 승리했다. 마지막 대결 후 브라운은 마이너리그 여러팀에서 플레잉 코치등으로 활약했으며 1920년 완전은퇴를 선언했다.
<모데카이 브라운의 통산 기록, 출처 : mlb.com>
모데카이 브라운은 MLB통산 16시즌 481경기에 출전했으며 239승 130패 49세이브, ERA 2.06, 탈삼진1,375개를 기록했다. 특히 그의 통산 평균자책점 2.06 은 200승이상 투수들 중에서 가장 낮은 기록이며 1906년 기록한 단일시즌 평균자책점 1.04는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의 사후 1년이 지난 뒤인 1949년. 어린시절 사고로 3손가락으로만 공을 던졌던 모데카이 브라운은 메이저리그 베테랑위원회의 추천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