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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Story/The Legend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에 헌액된 5명의 선수에 대해서 살펴보면 참으로 그 배분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AL 타자, 타이 콥(Ty Cobb)

NL 타자, 호너스 와그너(Honus Wagner)

AL 투수, 월터 존슨(Walter Johnson)

NL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Christy Mathewson)

그리고 타이 콥과 호너스 와그너와는 다른 홈런타자였던 베이브 루스(Babe Ruth).

<최초의 5인,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크리스티 매튜슨,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타이 콥, 월터 존슨>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최초의 5인 중 마지막으로 남은 한명이 호너스 와그너(Johannes "Honus" Wagner). MLB에 데뷔(1897년) 한지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로 꼽히고 있으며 피츠버그 파이리츠 (Pittsburgh Pirates)를 대표하는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전설적인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

 

그렇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MLB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가 있던 이 팀에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격수 강정호 선수가 입단한 것이다. 입단 후 강정호의 포지션에 대해서 설왕설래가 많은데 개인적으론 꼭 유격수로 자리잡았으면 한다. 100년전 MLB를 호령했던 최강의 유격수, 그 호너스 와그너가 있던 팀에서 대한민국의 강정호가 MLB를 호령하는 유격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강정호의 새로운 소속팀인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1882년 창단한 유구한 역사의 팀으로 1909년, 1925년, 1960년, 1971년, 1979년 총5번의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창단 후 주로 하위권에서 머물렀던 팀이지만 호너스 와그너의 입단(1900년)과 동시에 내셔널리그 강자(1901, 1902, 1903년 3연속 NL우승)로 군림했고 1909년 월드시리즈 우승이 팀의 첫 우승이다. 

 

1970년대가 전성기였으나 1980년대 이후 매우 부진해서 만년 하위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흠이지만 무려 21년간의 암흑기를 2013년에 끝냈다. 2014시즌도 선전하며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아쉽게 디비전시리즈 결정전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패하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주축선수들이 모두 남아있는 만큼 2015시즌에도 선전하길 바라며 더불어 강정호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가장 아름다운 구장 중 하나인 피츠버그 PNC파크에 입성한 강정호>

 


최고의 유격수라 불리는 호너스 와그너는 그가 활약한 21년의 MLB 캐리어 중 18시즌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함께했다. 이것은 단지 선수로서만 활약한 기간으로 은퇴 이후 코치로 있었던 39년을 더하면 무려 57년간 파이리츠와 함께한 것. 당연히 파이리츠를 상징하는 인물이며 피츠버그 홈구장인 PNC 파크앞에는 그의 실물크기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레전드, 호너스 와그너의 동상>

 

독일계 이민자 출신에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의 선수였기 때문에 "The Flying Dutchman" 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음...더치맨은 네델란드아닌가??) 그는 내셔널리그에서 타율은 8번, 타점 6번, 장타율 6번, 도루는 5번이나 각각 수위에 오를 정도로 잘치고 잘달리는 선수였으며 최고의 유격수란 닉네임이 붙을 정도의 엄청난 수비력을 가진 전형적인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특히나 8번의 타격왕은 토니 그윈(Tony Gwynn)과 함께 NL 공동 1위인데 AL의 타이 콥(12번)에 이은 2위의 기록이다. 즉, AL 타이 콥(타격왕 12회)과 NL 호너스 와그너(타격왕 8회)는 당시 양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였던 셈이다. 그는 데드볼 시대(dead-ball era)에서만 활약했기에 홈런은 통산 101개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6번이나 장타율 1위에 올라 결코 파워가 약한 선수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플라잉 더치맨으로 불렸던 호너스 와그너의 점핑캐치>

 

<호너스 와그너의 통산기록, 출처 : mlb.com>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호너스 와그너는 가정형편상 12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형들과 함께 탄광에서 일을 했다. 고된 노동대신에 이발사가 되기 위한 견습중이던 와그너는 틈틈이 형들과 함께 야구를 즐겼는데 형인 알버트 와그너를 보러온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 야구선수의 길을 가게된다.

 

지역리그에서 단번에 두각을 나타낸 와그너는 지금은 사라진 NL 팀인 루이빌 콜로넬스(Louisville Colonels)에 입단하면서 메이저리거가 된다. 첫 시즌에 61경기에서 0.350의 타율을 기록한 그는 이듬해에도 3할타율을 유지하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899년 루이스빌을 포함한 NL의 4팀이 정리되면서 당시 구단주가 소유하고 있던 또다른 팀인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하게 된다.

<루이빌 콜로네스에 입단당시 호너스 와그너>

 

 

피츠버그로 이적한 와그너는 첫해 타율 0.381로 타격왕에 오르며 물만난 고기가 되었다. 그리고 팀도 단번에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는데 이는 당시 해체된 팀의 주축선수들이 피츠버그로 한번에 이동하면서 단숨에 강팀이 된 것이다. 1901년 아메리칸리그가 출범하면서 내셔널리그의 스타 선수들을 스카웃하기 시작하는데 와그너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이었는데 당시 구단주와 돈독한 관계였는지 아니면 피츠버그 팀에 대한 의리였는지는 모르겠다.

 

호너스 와그너의 또 다른 장점은 그의 주루플레이에 있다. 그는 타이 콥과 같이 전형적인 호타준족의 선수였는데 통산 5번의 도루왕에 올랐으며 특히나 그가 기록한 27개의 홈스틸은 은퇴당시 내셔널리그 신기록이었다. (AL은 타이 콥의 52개) 1903년 3년연속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바그너는 처음으로 개최된 월드시리즈에서 "사이 영"이 이끄는 보스턴 아메리칸스 (현 보스턴 레드삭스)와 격돌하게 된다.

 

당시 내셔널리그의 최고 스타였던 와그너는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0.222에 그치며 부진했고 팀도 패배하여 최초의 월드시리즈 패권은 사이 영의 보스턴 아메리칸스에게 돌아갔다. 최초의 월드시리즈는 일종의 이벤트성 경기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미 확고한 기반을 잡았던 내셔널리그팀이 당연히 신생팀이나 다름없는 아메리칸리그팀을 이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고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와그너는 이 패배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 첫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 호너스 와그너>

 

절치부심한 와그너와 피츠버그는 1909년이 되어서야 다시 월드시리즈에 도전한다. 상대는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 타이 콥이 이끄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이때 디트로이트는 3년연속 월드시리즈에 도전 중이었으며 특히나 이 시리즈는 AL과 NL을 대표하는 천재타자 2명이 격돌한 유일한 경기이자 당시 양대리그 타격왕이 격돌하는 첫번째 월드시리즈로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었다. (와그너 0.339로 1위, 타이 콥 0.377로 1위 )

 

당시 와그너는 35세, 그리고 타이 콥은 22세였는데 결과는 타율 0.333과 6개의 도루(포스트 시즌 신기록)를 기록한 와그너의 압승이었다. 또한 피츠버그도 시리즈 전적 4승 3패로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으며 타율 0.231, 2도루에 그친 타이 콥은 또다시 분루를 삼켰다.(이번이 그의 마지막 월드시리즈였다.)

 

1910년 피츠버그에 온 이후 가장 낮은 타율 0.320(?)에 머무른 와그너는 1911년에는 37세에 타율 0.334를 기록하여 8번째이자 마지막 타격왕에 오른다. 1914년 40세의 와그너는 역대 2번째 3,000안타를 기록했다.그리고 1917년 내셔널리그 통산 최다안타인 3,430안타를 기록하고 영광스러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빌 제임스는 역대 메이저리그 타자중 베이브 루스 다음의 타자로 이 호너스 와그너를 꼽고 있으며 그는 현재까지도 유격수 부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는 호너스 와그너의 야구카드>

 

 

호너스 와그너 얘기를 하면서 빠질 수 없는 얘기가 바로 "T-206" 야구카드 얘기다. 1909년 미국의 한 담배회사가 담배갑에 야구선수 카드를 끼워팔기 시작했는데 술, 담배를 싫어했던 와그너가 즉각 발매중지를 요청했다. 때문에 이 와그너의 카드는 애시당초 생산량이 극히 적어서 그 희소성이 엄청난데 보존상태가 좋은 것은 2백만달러 이상을 호가하고 있다고 한다.

 

호너스 와그너는 술, 담배를 멀리했던 것처럼 자기관리에도 철저했다. 하루에 10시간이상을 무조건 잤다고... 그리고 팬들에게도 항상 상냥했으며 유머감각도 뛰어나서 기자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한다. 와그너는 은퇴이후에도 피츠버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무려 39년간 코치로 함께 했다. 거의 반평생 이상을 파이리츠와 함께한 것인데 코치로 재임하면서 달았던 등번호 33번이 영구결번되었다.

 

호너스 와그너는 1955년 81세의 나이로 타계했으며 피츠버그의 한 기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신의 화려했던 젊은 날을 함께했던 피츠버그, 바로 그곳에서 영면에 들어간 것이다.

<아이들에게 싸인을 해주고 있는 할아버지 호너스 와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