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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Story/The Legend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나이 , "철마" 루 게릭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랑한 야구선수 중 한명인 "루 게릭"(Henry Louis Gehrig)은 1903년 6월 19일  뉴욕 맨하탄의 가난한 독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출생당시 몸무게가 6.4kg에 달할 정도로 슈퍼베이비였던 루 게릭은 성장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운동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는데 특히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풋볼과 야구에 대한 재능이 돋보였다.

 

학창시절 루 게릭이 처음으로 많은 관심을 받게된 사건은 1920년 6월 26일 컵스 파크(Cubs Park)에서 있었던 한야구경기에서였다. 고교야구였지만 이날 1만명 이상의 관중이 들어왔는데 루 게릭은 8 : 6 으로 이기고 있던 9회초 17세 고등학생이 친 것으로는 믿기 어려운 엄청난 장외 만루홈런(Grand Slam)을 쳐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하지만 고교 졸업후 루 게릭은 야구가 아닌 풋볼 장학생으로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으며 대학에서도 풋볼과 야구를 병행했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양키스의 레전드 "루 게릭">

 

 

1923년 4월 18일은 뉴욕 양키스 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일 것이다. 오랜기간동안 뉴욕 자이언츠 홈구장을 빌려쓰고 있던 양키스에게 드디어 새집인 "양키 스타디움"(Yankee Stadium)이 생긴 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키 스타디움은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 Built)"으로 불렸는데 처음으로 양키 스타디움에 경기가 있었던 날에도 어김없이 루스의 축포가 터져나왔다.  

<1923년 개장한 양키 스타디움>

 


그리고 바로 이날. 양키스에게는 또다른 기념비적인 날이었는데 컬럼비아 대학 야구팀의 투수였던 루 게릭이 컬럼비아 야구 팀 역사상 최고 기록인 17개의 삼진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대학 야구팀 경기따위가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양키스에게 당연히 큰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경기를 바로 양키즈 스카우터인 폴 크리첼(Paul Krichell)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폴 크리첼은 루 게릭의 투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엄청나게 파워풀한 스윙을 하는 좌타자로서의 루 게릭이었다. 폴 크리첼이 조용히 지켜보는 동안 루 게릭은 믿기 힘든 엄청난 비거리의 홈런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 중 일품인 것은 4월 29일 컬럼비아 사우스필드에서 보여준 137m 짜리 대형 장외홈런이었다.

 

이 홈런이 있은 후 바로 두달 뒤에 루 게릭은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게 된다. 향후 15년간 뉴욕 양키스의 4번타자로 활약할 "Iron Horse"가 양키스 유니폼을 입게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1923년 6월 15일 경기에서 대타(pinch hitter)로 출전하면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1923년과 1924년 2시즌간 루 게릭은 주로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면서 타율 0.344, 61홈런을 기록했다. 그가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야구를 한 것은 이 때가 유일했는데 처음 두 시즌동안 간간히 대타로만 메이저리그 무대에 등장한 게릭은 총 23경기에 출전에 그쳤다. 

 

<루 게릭의 학창시절 모습>

 

 

1925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경기에 출전한 루 게릭은 437타수 동안 타율 0.295, 홈런 20개, 68타점을 기록하며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23살의 양키스 1루수, 루 게릭의 잠재력은 1926년부터 폭발했는데 타율(AVG) 0.313, 출루율(OBP) 0.420, 장타율(SLG) 0.549 면에서 모두 흠잡을데 없는 기록이었다. 

 

그리고 생애 처음 맞이한 1926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로저스 혼스비(Rogers Hornsby), 그로버 알렉산더(Grover Alexander)가 이끄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0.348의 타율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아쉽게도 3승 4패로 우승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aint Louis Cardinals)는 치열한 접전끝에 4승 3패로 월드시리즈 우승트로피를 가져갔는데 이때가 카디널스 프랜차이즈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아쉬운 1926년을 보내고 새로 맞이한 1927년 루 게릭은 자신의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그 유명한 양키스 살인타선(Murderers' Row)이 완성된 이 시즌에 그는 218개의 안타를 치면서 타율 0.373, 47 홈런, 175 타점으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고 장타율만 무려 0.765 에 이르렀다.

 

얼 콤즈(중견수), 마크 쾨니히(유격수), 베이브 루스(우익수), 루 게릭(1루수), 밥 뮤절(좌익수), 토니 라제리(2루수)로 이어지는 양키스 살인타선은 정규시즌 110승 44패 (2위와 승차는 무려 19경기)를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선 내셔널리그 MVP이자 타격왕인 폴 워너(Paul Waner)가 이끄는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4경기만에 스윕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양키스 통산 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1926년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타격왕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해리 헤일먼(Harry Heilmann, 0.398)에게, 홈런왕은 팀 동료인 베이브 루스(Babe Ruth, 60개) 에게 내준 루 게릭은 타점왕과 아메리칸 리그 MVP에 선정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뉴욕 양키스 최고의 타선이었던 1927년의 Murderer's Row>

 


 
루 게릭은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1925년부터 1934년까지 10년간 베이브 루스와 함께했다. 그들의 등번호처럼 베이브 루스가 3번타자, 루 게릭이 4번타자로 대부분 경기에 나갔는데 게릭이 루스보다 더 많은 홈런을 기록한 것은 루스의 양키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34년 딱 한번이다. (루 게릭이 49홈런, 베이브 루스는 22홈런을 기록. 다음해 베이브 루스는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되었고 거기에서 은퇴했다.)

 

1932년 6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Philadelphia Athletics)를 만난 루 게릭은 한 경기 4홈런을 때려낸 20세기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5번째 타석에서도 홈런성 타구를 날려서 1경기 5홈런을 달성하는가 싶었지만 필라델피아 외야수 알 시몬스(Al Simmons)가 가운데 담장위로 넘어가는 타구를 점프해서 잡아내면서 5홈런에는 실패했다.

 

경기 후 감독인 조 매카시(Joe McCarthy)가 루 게릭에게 오늘만큼은 너보다 유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축하했는데 하필이면 이날 뉴욕 자이언츠(New York Giants)의 레전드인 존 맥그로(John McGraw) 감독이 은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다음날 신문 헤드라인에서 완전히 묻혀버렸다. 항상 그렇듯 루 게릭은 화려한 조명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1경기 4홈런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주목받지 못한 루 게릭>

 

 

루 게릭이 그 유명한 "철마(The Iron Horse) 라는 별명을 갖게 된것은 그가 1925년부터 1939년까지 15년간 무려 2,130경기연속 출장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연속경기 출장기록은 1925년 6월 1일, 게릭이 유격수 폴  웨닝거를 대신해 대타로 경기에 투입되면서 시작됐다. 다음날인 6월 2일, 슬럼프에 빠져있던 1루수 월리 핍을 대신해 선발 1루수로 경기에 나선 게릭은 두 개의 안타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5년간 양키스 주전 1루수로 활약했다.

 

당연히 2,130 경기연속 출장기록을 달성하기까지는 상당한 위기의 순간이 많았는데 예를들어 타석에서 헤드샷을 맞아서 기절한 경우에도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끝까지 경기를 마쳤으며 허리부상으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타석에 들어서면서 기록을 이어나갔다.

 

이 2,130경기 연속출장 기록은 거의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졌었는데 루 게릭의 마지막 타석으로부터 56년이 지난 후인 1995년 9월 6일, "철인(Iron Man)"이라는 별명을 갖고있는 볼티보어 오리올스 (Baltimore Orioles)의 유격수 칼 립켄 주니어(Calvin Edwin Ripken Jr.)에 의해서 경신되었다. 그는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2,632경기까지 이어간 후 스스로 중단했다.

<2,131경기 연속출장으로 신기록을 세운 칼 립켄 주니어가 팬들에게 모자를 들어 답례하고 있다.>

 

 

참고로 한국프로야구(KBO)의 연속경기 출장기록은 현 LG 트윈스의 최태원 코치의 1,014경기이고 일본프로야구(NPB)는 히로시마 도요카프(Hiroshima Toyo Carp)의 철인으로 불렸던 기누가사 사치오(Sachio Kinugasa)가 기록한 2,215경기이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돌격대장, 최태원의 수비모습>

 

 

<2,215경기에 연속출장한 히로시마의 철인, 기누가사 사치오>

 

 


1938년 시즌중반, 루 게릭은 자신의 몸에 무언가 이상이 발생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풀타임 출장한 1925년(타율 0.295)을 제외하고 모두 3할, 100타점이상을 기록했던 그의 타율이 처음으로 2할대(0.295)로 떨어졌다. 부진을 만회하기 위하여 더욱 힘차게 스윙을 했지만 오히려 홈런과 장타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다.

 

1939년 양키스 스프링캠프, 이때부터 루 게릭의 무시무시했던 힘은 이미 현저히 줄어있었다. 심지어 주루 플레이도 갑자기 둔해진 느낌이었는데 한 연습경기에서는 도중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스프링캠프가 끝날 무렵까지 게릭은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 하나 기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는 시즌이 개막할때도 여전해으며 4월말까지 그는 0.143의 타율과 단 1타점만을 기록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기량이 쇠퇴했다고 보기에 어려웠던 것은 그가 28타석에서 단 1개의 삼진만을 기록하고 있었기때문이었다. 즉, 예전처럼 공을 맞추고는 있지만 아무리 힘껏 스윙해도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급기야 4월 30일 2,130번째 연속출장 경기에서는 수비에서도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날 수비에서 내야수들이 땅볼타구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1루로 힘겹게 돌아가고 있는 게릭을 기다려야 했다.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투수였던 조니 머피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계속해서 게릭에게 화이팅을 외쳤다. 이렇게 평범한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격려와 박수를 보내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게릭은 만감이 교차하게 되었고 경기가 끝난 후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다. 

 

<루 게릭의 홈스틸 장면, 그는 본래 주루에도 능한 선수였지만 더이상 그럴 수 없었다.>

 

 

1939년 5월 2일 루 게릭은 감독인 존 매카시를 찾아가서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고 감독은 그의 뜻을 존중했다. 무려 15년간 양키스의 모든 경기에 출장했던 루 게릭은 그렇게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스스로 마감했다. 당시엔 출전선수 명단을 팀의 주장이 경기전 심판에게 전달했는데 게릭에게 양키스 선발명단을 건네받은 심판은 큰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경기시작 전 당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홈구장인 브릭스 스타디움(Briggs Stadium)의 장내 아나운서는 팬들에게 슬픈소식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루 게릭의 연속경기 출장기록이 2,130경기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벤치에 앉아 눈물을 보이고 있던 루 게릭에게 디트로이트 팬들은 기립박수로 그를 위로해주었다.

 

아쉬워하는 팬들의 마음과 달리 게릭의 몸상태는 급격히 안좋아졌고, 1939년 6월 21일 뉴욕 양키스는 게릭의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워싱턴 세네터스(Washington Senators)와의 경기가 있었던 7월 4일은 미국 독립기념일인데 바로 이날 루 게릭의 은퇴식이 열렸다. 양키스스타디움에는 6만명이 넘는 관중들이 15년간 팀에 헌신했던 4번타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찾아왔고 "살인 타선" 이라 불렸던 1927년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들도 모두 참석했다.

 

그리고 뉴욕 양키스는 15년간 팀의 기둥인 되어준 그의 등번호인 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는데 이것이 메이저리그 최초의 영구결번이었다. 이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많은 선물들과 트로피를 안겨주었는데 아쉽게도 게릭은 이러한 선물들을 들고있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루 게릭은 팬들에게 은퇴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 란 제목의 이 연설은 야구에서의 게티스버그 연설이라 불릴 정도로 MLB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연설로 꼽히고 있다.  이미 의사로부터 절망적인 진단을 받은 후였지만 루 게릭은 이 연설에서 지난 17년간 양키스와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같다고 말함으로써 팬들을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팬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는 루 게릭>

 

 

1939년 시즌종료 후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결정하는 전미기자협회는 특별 케이스로 루 게릭을 유예기간 없이 바로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선정하였다. 이로서 루 게릭은 36세의 역대 최연소 나이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되었다.

 

은퇴 후 불과 2년 뒤, 갑작스런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 - 지금은 루 게릭병이라고 한다. - 발병으로 신체기능이 거의 마비된 루 게릭은 아내 엘리너 게릭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게릭부부였지만 엘리너 게릭은 재혼하지 않았고 평생을 루 게릭병 연구지원에 힘썼다.

<영면에 들어간 루 게릭을 바라보고 있는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는 1941년 7월 6일 양키 스타디움 외야 중앙쪽에 루 게릭을 기리는 헌정비를 세웠는데, 그 헌정비에는 이러한 문구가 들어가있다.


"한 남자가 있었다. 예의 바른 신사였다.

누구나 놀랄 만한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이 위대한 야구 선수는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