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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Story/The Legend

레드삭스 "황금외야진" 의 주인공, 트리스 스피커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이른바 "밤비노의 저주"로 영원히 고통받을 것만 같았던 보스턴 레드삭스 (Boston Red Sox) 는 최초의 월드시리즈(1903년) 우승팀이다.

 

그리고 저주가 시작되기 전인 1910년대  4번 (1912년, 1915년, 1916년, 1918년) 이나 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는데 1903년은 사이 영 (Cy Young), 1916년과 1918년은 "투수"였던 베이브 루스 (Babe Ruth)가 그 주역이었다면 1912년과 1915년 우승의 주역은 이른바 "황금외야진"으로 불리는 강력한 외야진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황금외야진의 중심에는  "The Grey Eagle(회색 독수리)"로 불리는 한 선수가 있었다.

<1912년, 당시 24살의 중견수 트리스 스피커>

 

 

"The Grey Eagle" 트리스 스피커 (Tristram E. Speaker) 는 타이 콥 (Tyrus "Ty" Cobb) 과 함께 메이저리그(MLB) 를 대표하는 중견수로 꼽히고 있으며 특히나 그의 수비는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는 22시즌동안 통산 0.345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792개의 2루타(Doubles Hit)로  이부문 MLB 신기록을 갖고 있다. (2위는 746개의 피트 로즈) 또한 그는 통산 3,515안타를 기록하여 4,256개를 기록한 피트 로즈 (Pete Rose), 4,191개를 기록한 타이 콥 등에 이어 역대 5위에 랭크되어 있다. 게다가 그는 수비면에서 팀에 공헌바는 바가 컸는데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수없이 많은 타구와 주자를 잡아냈다고 한다. 참고로 중견수였던 그의 수비위치는 2루 베이스 바로 뒤였다고 전해진다.

<수비연습중인 트리스 스피커>

 

 

트리스 스피커 (Tris Speaker)는 텍사스 지역의 마이너리그를 거쳐 1907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데뷔했으며 1909년 주전 중견수로 도약한뒤 1912년과 1915년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15년 스피커의 타율이 0.322로 떨어지자 트레이드되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Cleveland Indians)로 이적했으며 그곳에서는 감독겸 선수로 활약하면서 인디언스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스피커는 1937년 두번째로 개최된 명예의 전당에서 또 한명의 클리블랜드 슈퍼스타인 냅 라조이 ("Nap" Lajoie) 와 함께 헌액되었으며 1999년 스포팅 뉴스(Sporting News)가 선정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100인에 선정되었다.

<트리스 스피커의 메이저리그 통산기록. 출처 : mlb.com>

 

<1937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트리스 스피커는 텍사스 출신으로 1888년 4월생이다. 어린시절에 말에서 떨어지면서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왼손잡이가 되었던 그는 야구선수가 되기 전엔 목장에서 잡일을 하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던 중 1906년 지역내 한 야구팀에 입단할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야구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07년 비록 지역 마이너리그 팀이었지만 좋은 활약을 하고있던 스피커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신인 보스턴 아메리칸스(Boston Americans) 에 운좋게 입단하게 되면서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다. 입단 첫해(1907년), 단 7경기 출전에 19타수 3안타 0.158 의 타율에 그친 스피커는 1908년 마이너리그팀으로 트레이드되었으나 (사실상 방출) 그곳에서 0.350의 맹타를 휘두르자 다시 보스턴에서 영입했다.

 

1909년 보스턴의 주전 중견수 데니 설리번(Denny Sullivan)이 클리블랜드 냅스(Cleveland Naps)로 이적하면서 스피커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스피커는 143경기에 출전했는데 타격에서는 0.309 의 타율을 기록했고 특히 수비부문에서 외야수임에도 12번의 더블플레이를 기록하는등 공수에서 알토란같은 활약을 했다.

 

이듬해인 1910년 레드삭스는 좌익수 더피 루이스 (Duffy Lewis)를 영입했다. 그리고 이 영입으로 레드삭스는 트리스 스피커, 더피 루이스, 해리 후퍼 (Harry Hooper) 로 이어지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비를 보여준 "황금외야진"  - "The Golden Outfield" 또는 "Million-Dollar Outfield"  라고도 한다. - 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피커는 이 황금외야진의 중심이었다.

<레드삭스의 황금외야진, 왼쪽부터 더피 루이스, 트리스 스피커, 해리 후퍼>

 


1910년부터 1915년까지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외야수 3인방이었던 이들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야진으로 불리는데 타격도 좋았지만 특히 3선수 모두 수비면에서 일가견이 있었다. 훗날 스포츠 작가인 그랜트랜드 라이스 (Grantland Rice) 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이처럼 빠르고 견고한 수비를 보여주는 외야진을 본적이 없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다. 그들은 도대체 외야수인가? 내야수인가?  팬웨이파크 전 지역이 그들의 손안에 있다."  스피커는 평상시 2루 베이스에 바짝 붙어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외야로 날아가는 타구를 모두 쫓아가서 잡아낼 정도로 무척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실상 팀의 5번째 내야수였다.

 

이와같은 강력한 수비진에도 불구하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1910년과 1911년 모두 아메리칸리그(AL) 4위에 그쳤다. 하지만 황금외야진이 건재했으며 2년간의 경험을 쌓은 스피커가 드디어 베스트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1912년 트리스 스피커는 전 경기에 출전하여 53개의 2루타, 10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각각 부문별 수위에 올랐으며 580타수 222안타로 타율 0.383, 장타율 0.567, 52도루, 90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레드삭스에서 처음으로 단일시즌 50도루(SB, Stolen Bases) 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으며 1973년 토미 하퍼(Tommy Harper) 가 54도루를 기록할때까지 팀내 최다 도루기록이었다.

 

게다가 스피커는 1912년 4월 20일 완공된 펜웨이파크 (Fenway Park) 첫번째 경기에서 연장 11회말, 팀의 역사적인 7 - 6 승리를 결정짓는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면서 새 구장의 탄생을 기념했다. 이렇듯 공수에 걸친 스피커의 맹활약에 힘입어 레드삭스는 1912시즌 2위 워싱턴 세너터스 (Washington Senators) 를 14게임차로 앞서며 1위에 올랐고 대망의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1912년 레드삭스와 스피커의 월드시리즈 상대는 당대 최고의 명장, 존 맥그로 (John McGraw) 가 이끄는 뉴욕 자이언츠 (New York Giants) 였다. 당시 월드시리즈는 2차전에서 승부를 가리지못해 8차전까지 이어졌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스피커는 평범한 파울플라이를 프레드 스노그래스 (Fred Snodgrass) 가 잡지 못하는 행운이 따르면서 동점타를 날릴 수있었고 레드삭스는 10회말 기어이 점수를 뽑아내면서 두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초대 월드시리즈 우승 후 잠시 암흑기에 빠져있던 보스턴 레드삭스는 신구장인 펜웨이파크 완공과 동시에 두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정규시즌과 월드시리즈에서 맹활약한 스피커는 AL MVP에 선정되었다.

<1912년 최초로 개장한 보스턴의 홈구장, 펜웨이파크>

 

<스피커는 1912년 아메리칸 리그(AL) MVP에 선정되었다.>

 

 

월드시리즈 우승 후 3년뒤인 1915년 스피커는 0.322의 타율을 기록하며 여전히 보스턴의 황금외야진을 이끌었고 레드삭스 마운드에는 베이브 루스라는 좌완투수가 등장하여 18승을 거두는 맹활약을 펼친다. 이처럼 투타 중심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은 레드삭스는 3년만에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였고 필라델피아 필리스 (Philadelphia Phillies) 를 상대로 팀의 3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1915년 시즌 종료 후, 스피커의 타율하락을 우려한 레드삭스 경영진은 그의 연봉을 삭감하려했고 이에 스피커가 반발하자 1916년 4월 샘 존스(Sad Sam Jones), 프레드 토마스(Fred Thomas)를 받는 대가로 그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해버렸다. 스피커의 이탈로 레드삭스의 굳건한 외야진을 상징했던 황금외야진도 점차 퇴색하게 되었다. 

 

클리블랜드에서 맞이한 첫시즌인 1916년 트레이드 결과에 엄청나게 분노했던 스피커는 다행히 그 억울함을 경기장안에서 풀었다. 그는 1916 시즌 최다안타, 최다2루타, 장타율, 출루율에서 모두 1위에 올랐으며 특히 0.386의 타율을 기록하여 이전까지 9년연속 타격왕에 올랐던 타이 콥 (타율 0.371)을 제치고 처음으로 수위타자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스피커는 클리블랜드에서 보낸 11시즌중 1번을 제외하고 모두 3할타율을 달성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타이 콥과 함께있는 모습, 그는 타이 콥을 제치고 딱 한번 타격왕에 올랐다.>

 


다행히 클리블랜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트리스 스피커는 예의 쾌활한 성격을 바탕으로 인디언스의 중심이 되었으며 냅 라조이 (Napoleon "Nap" Lajoie) 라는 대스타를 잃은 클리블랜드 팬들의 상실감을 다시 회복시켰다. 어느 순간부터 인디언스의 감독인 리 폴은 팀에 관련한 중요사안들을 모두 스피커와 상의했으며 1919년 후반 스피커는 아예 선수겸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1920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안겨주면서 감독으로서의 그의 역량을 만천하에 증명하였다.

 

정규시즌 막판, 당시 2위였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Chichago White Sox) 와의 결정적인 맞대결에서 스피커는 화이트삭스의 강타자, 조 잭슨 ("Shoeless" Joe Jackson) 의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전력질주한 후 멋지게 잡아냄으로써 경기를 마무리했고 인디언스는 1894년 창단이래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20년 브룩클린 로빈스 (Brooklyn Robins, 현 LA 다저스 전신) 와 만난 월드시리즈에서 트리스 스피커는 마지막 경기에서 3타점 적시타를 쳐내며 인디언스의 3 : 0 완승을 이끌어냈다. 결국 감독겸 선수였던 그의 마지막 한방으로 인디언스는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1920년은 뉴욕 양키스 (New York Yankees) 칼 메이스(Carl Mays) 의 투구에 머리를 강타당한 유격수 레이 채프먼 (Ray Chapman)이 안타깝게 요절한 해이기 때문에 더욱 인디언스에게 중요한 해였다. 특히나 채프먼은 시즌 전 은퇴를 종용받았으나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전에는 은퇴생각이 없다고 맞서던 선수이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흐른 1925년 5월 17일, 스피커는 워싱턴 세너터스 (Washington Senators) 투수 톰 잭커리 (Tom Zachary) 로부터 안타를 뽑아내면서 역사상 5번째, 인디언스 출신으로는 냅 라조이에 이어 두번째로 3,000안타를 달성한 타자가 되었다. 

<인디언스의 영웅이 된 트리스 스피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야구인생에 짙은 먹구름이 찾아왔는데 1926년 클리블랜드 감독겸 선수였던 트리스 스피커와 역시 디트로이트 감독겸 선수였던 타이 콥의 승부조작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이 의혹의 최초 제보자는 디트로이트의 투수 더치 레오나드 (Dutch Leonard) 였는데 석연치 않았던 점은 제보자인 레오나드와 타이 콥이 애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랜디스 커미셔너는 스피커와 콥의 청문회를 개최하였고 레오나드에게 청문회에 참석하여 증언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핑계로 증언을 거부했다. 청문회란 모름지기 어떤 문제점에 대해서 당사자들을 참석시켜서 입증하는 자리인데 문제점을 제기한 사람이 없어졌으니 증명해야 할 것도 없어져서 모양새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결국 랜디스 커미셔너는 두 사람에게 "의혹없음"으로 판정하였고 소속팀으로 복귀를 지시했다. 이 요상한 스캔들의 진위는 당시 양팀 감독이었던 스피커와 콥의 트레이드로 인하여 마이너리그로 강등된 더치 레오나드가 억하심정으로 꾸며낸 허위주장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당대 슈퍼스타였던 두 사람들에게 지워진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최초 승부조작 의혹의 제보자였던 더치 레오나드>

 

커미셔너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트리스 스피커와 타이 콥은 안타깝게도 모두 소속팀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영원히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함께할 것 같았던 타이 콥은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로 이적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곳에서 4,000안타를 달성하고 쓸쓸히 은퇴했다. 이일로 학을 뗀 스피커 역시 더이상 감독자리를 맡지 않았고 1927년 워싱턴 세너터스로 이적했다. 이적후 세너터스에서 0.327의 타율로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한 스피커는 이듬해엔 타이 콥이 있던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Philadelphia Athletics)로 이적했으며 1시즌 후 그곳에서 타이 콥과 같이 은퇴했다.

 

은퇴 시점인 1928년(40세) 스피커의 타율은 0.267에 그쳤는데 그가 3할 미만의 타율을 기록한 것은 데뷔 초기인 1908년(20세) 0.224를 기록한 이래 20년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