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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Story/The Legend

가장 뛰어난 플레이스 히터(Place-Hitter), 에디 콜린스

"플레이스 히터" (Place-Hitter)란 자신이 마음먹은 곳, 즉, 수비수가 없는 곳으로 의도적으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뛰어난 타격기술을 보유한 타자를 말한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뛰어난 타격기술을 보유한 교타자쯤으로 이해하면 되지않을까 싶다.

 

오랜 메이저리그(MLB)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플레이스 히터중 한명으로 손꼽히고 있는 "에디 콜린스"  (Eddie Collins)는 이러한 뛰어난 타격뿐아니라 야수로서 또한 주자로서도 매우 영리한 플레이를 펼친 속칭 "꾀돌이"였다. 1887년 5월생인 에디 콜린스는 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전신인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Philadelphia Athletics)와 시카고 화이트삭스 (Chicago White Sox)의 주전 2루수로서 무려 25년간 MLB에서 활약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시절 에디 콜린스의 스윙 모습>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는 아이비리그 (Ivy League)소속인 콜롬비아 대학 출신이었으며 그때문인지 커리어내내 재치만점의 플레이를 보여준 영리한 선수였다. 그는 자신의 학력과 플레이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으며 그때문에 그에게는 "Cocky" (건방진 놈) 라는 유쾌하지 않은 별명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슈퍼스타인 동시에 탁월한 덕아웃 리더였으며 이러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1924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감독겸 선수로 활약했으며 은퇴후에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팀이었던 보스턴 레드삭스 (Boston Red Sox)의 단장(GM)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어린시절부터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주목받았던 에디 콜린스는 19세였던 1906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콜롬비아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신분이었기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으며 졸업후인 1908년부터 본격적인 메이저리거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1909년 애슬레틱스의 주전 2루수로 낙점된 에디 콜린스는 0.347의 타율과 67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전설적인 활약을 예고했다.

 

1910년 에디 콜린스는 0.324의 타율과 커리어 하이인 81개의 도루(Stolen Bases)를 성공시키는 활약으로 리그 우승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으며 어슬레틱스는 시카고 컵스 (Chicago Cubs)를 물리치고 프랜차이즈 최초로 월드시리즈 반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콜린스의 주력은 동시대 다른 선수들과 비교했을때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도루를 위해 상대하는 모든 투수의 견제동작을 부지런히 분석하였으며 이러한 노력결과 누구보다도 리드폭을 길게 가져갔고 이는 평범한 주력임에도 많은 도루를 가능하게 했다. 당시 그가 기록한 한 경기 6도루는 현재까지도 한경기 최다도루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에디 콜린스는 당시 어슬레틱스의 강타자 프랭크 베이커 (Franklin "Home Run" Baker)등과 함께 화려한 "10만달러 내야진" (100,000$ infield)을 구축하였으며 이들의 고른 활약으로 어슬레틱스는 1910년, 1911년, 1913년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 

<1913년 애슬래틱스 "10만달러 내야진"의 일원이었던 에디 콜린스>

 

 

 

1914년 고액 연봉자였던 콜린스는 팀의 재정문제로 인하여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화이트삭스가 지급한 그의 연봉은 15,000달러였으며 이는 타이 콥 (Ty Cobb), 트리스 스피커 (Tris Speaker)에 이어 세번째로 높은 금액이었다. 시카고에서도 콜린스의 활약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으며 1917년 리그 우승과 동시에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오렸으며 1919년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19년 신시내티 레즈 (Cincinnati Reds)와 월드시리즈에서 격돌한 에디 콜린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블랙삭스 스캔들" (Black Sox Scandal) 에 휘말리고 만다. 당시 연봉문제로 구단과 마찰이 있었던 화이트삭스의 선수들이 도박사들과 결탁하여 승부조작 사건을 일으켰고 이것을 알리없는 신시내티는 월드시리즈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에 연루된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모두 영구제명이라는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다. 월드시리즈에서 부진했던 에디 콜린스에게도 많은 의심의 눈초리가 집중되었지만 다행히 그는 무혐의 처분을 받아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1930년 은퇴를 앞두고 있는 에디 콜린스, 타이 콥 그리고 트리스 스피커>

 

 

 

블랙삭스 스캔들이 발생한 후 5년뒤인 1924년 콜린스는 화이트삭스의 선수겸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26년까지 3년간 174승 160패를 기록했다. 1927년 친정팀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선수겸 코치로 복귀한 콜린스는 코치로서 활동에 더 집중하였고 이후 4년간 총 143타석에서 대타로만 경기에 출전하였다.

 

1930년 8월, 드디어 25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은퇴를 선택한 에디 콜린스는 커리어 통산 2,826경기, 12,044타석에 출장하여 타율(AVG) 0.333, 출루율(OBP) 0.424, 장타율(SLG) 0.429, 1300타점(RBI), 741도루(SB)를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총 3,315개의 안타는 MLB통산 1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특히 그의 통산 512개의 희생번트 (Sacrifice Bunts) 기록은 현재까지도 2위와 100개이상 차이가 나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193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에디 콜린스의 동판>

<에디 콜린스의 MLB 통산기록, 출처 : mlb.com>

 

 

 

은퇴 후 전과 다름없이 계속 어슬레틱스의 코치로 후진양성에 힘썼던 콜린스는 3년뒤인 193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GM)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건강악화로 사임하게되는 1947년까지 장장 15년간 레드삭스의 단장으로 역임하였다. 1939년 4번째로 열린 명예의 전당 선정투표에서 에디 콜린스는 총 77.74%의 득표율을 획득하여 조지 시슬러 (George Sisler), 윌리 킬러 (Willie Keeler)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영원한 메이저리그의 레전드로 남게 되었다.    

<은퇴 후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이 된 에디 콜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