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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Story/The Legend

84년간 지속된 최다안타 기록보유자, 조지 시슬러

"조지 시슬러"(George Harold Sisler)는 1893년 3월생으로 그의 별명은 "Gorgeous George", 여기서 "Gorgeous"는 화려하다는 뜻이다.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15시즌동안 활약했으며 주로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St. Louis Browns)에서 1루수로 활약했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는 현재 NL의 카디널스와는 관계없는 팀으로 AL의 볼티모어 오리올스 (Baltimore Orioles)의 전신이다. 1920년부터 2004년까지 시슬러는 단일시즌 최다안타 기록 보유자였다. 그리고 1922년 0.420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41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246개의 안타, 51도루, 18개의 3루타로 각각 이부문 수위에 오르기도했다. 이 1922년의 조지 시슬러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1루수로 평가받고 있다.

 

시슬러는 1939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1999년 스포팅 뉴스(The Sporting News)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메이저리거 100인(Baseball's 100 Greatest Players) 중 서열 33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은퇴 후 시슬러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로 활약했으며 브룩클린 다저스(Brooklyn Dodgers)에서 브랜치 리키(Branch Rickey)와 함께 흑인선수들의 영입에 앞장서서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1915년 MLB에 데뷔한 조지 시슬러>

 

 

조지 시슬러는 오하이오주 맨체스터(Manchester, Ohio)에서 독일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1년 시슬러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했지만 미시간 대학(University of Michigan)에서 야구를 계속했다. 대학시절 7이닝동안 20타자를 삼진아웃으로 처리할 정도로 뛰어난 투수였던 시슬러는 당시 코치였던 브랜치 리키를 만나게 되었다. 대학졸업 후 피츠버그와 체결했던 계약때문에 잠시 분쟁이 있었지만 리키의 도움으로 해당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었고 시슬러는 바로 리키가 감독으로 있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입단할 수 있었다.

<미시건 대학시절 시슬러의 모습>


  
1915년 시슬러는 투수로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의 투수로서의 통산기록은 24번의 등판에서 5승 6패, era 2.35를 기록했다. 데뷔 직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에이스 가이 모튼(Guy Morton)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신의 우상이었던 "빅 트레인" 월터 존슨(Walter Johnson)과의 대결에서는 완투승을 거두어 당시 센세이션을 일르켰다.

 

아직 포지션이 정립되지않았던 시슬러는 1916년 1루수로 포지션을 고정했고 이때부터 9년연속 3할타율을 기록하였다. (1920년과 1922년은 4할타율을 기록.) 또한 시슬러는 그해 34도루를 기록할 정도의 빠른발을 가진 타자이기도 했다.

 

1917년 시슬러는 타율 0.353, 190안타, 37도루를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8년에는 0.341의 타율, 45도루를 기록했고 시즌 종료후 세계 1차대전(World War I)으로 말미암아 군에 입대, 타이 콥과 같이 화학부대에 배치되었다.

 

1920년 시슬러는 154경기 전 경기 전 이닝에 교체없이 출전하여 631타수 "257안타"를 기록하며 0.407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의 타율은 600타수 이상 들어선 선수 중 가장 높은 타율이었다. 자신의 최고시즌으로 그는 당시 타격왕 4연패를 노리고 있던 타이 콥을 큰 격차로 따돌리고 생애 처음 타격왕이 되었으며 1911년 타이 콥(Ty Cobb)이 세웠던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248안타)을 경신하였다. 이 1920년의 최다안타 기록은 84년 후인 2004년 스즈키 이치로(Ichiro Suzuki)가 262안타를 기록하며 경신하게 된다. 다만 스즈키 이치로의 최다안타 기록은 161경기 762타석, 704타수동안 기록한 것이고 시슬러는 154경기 692타석, 631타수에서 기록한 것이다.

<조지 시슬러는 발군의 타격실력과 동시에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해 54홈런을 때린 베이브 루스에게 밀려 홈런, 타점부분에서 모두 2위에 그치며 생각보다 크게 조명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시슬러의 인지도는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타이 콥(Ty Cobb), 베이브 루스(Babe Ruth), 트리스 스피커(Tris Speaker) 등 대타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1922년 시슬러는 41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하게 된다. 비록 윌리 킬러(William Keeler)가 1897년에 세운 44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경신하지는 못했지만 1941년에 조 디마지오가 새 기록을 남기기 전까지 20세기 최다 연속경기안타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1941년 56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한 조 디마지오(Joe DiMaggio)에 의해 경신되었다.

 

당시 브라운스는 같은 세이트루이스 프랜차이즈인 카디널스와 같은 구장을 쓰고 있었는데 이 팀에서 로저스 혼스비(Rogers Hornsby)라는 또 한명의 대타자가 경이적인 타격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자연히 스포츠맨스 파크(당시에는 양팀이 모두 이 구장을 사용하였다)에 모여든 팬들은 누가 더 뛰어난 선수인지를 놓고 설전을 벌이게 되었다.

 

또한 시슬러는 1901년 냅 라조이(Nap Lajoie)의 0.426, 1924년 로저스 혼스비(Rogers Hornsby)의 0.424에 이은 0.420의 타율을 기록하여 20세기 통틀어 3번째로 높은 타율을 기록했고 아메리칸 리그 시즌MVP에 1루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 또한 1916년부터 1922년까지 매시즌 25도루 이상을 기록했던 시슬러는 1922년엔 51도루에 성공하여 도루부문 1위역시 차지했다.

 

그런데 1923년 시슬러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급성축농증 후유증으로 인해  시력에 이상이 생긴것이다. 당시 그는 모든 사물이 두개로 보였다고 한다. 시슬러는 1923년 시즌내내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24년에 돌아와 0.305의 타율로 여전한 타격솜씨를 자랑했다. 그는 1924 시즌을 앞두고 팀의 감독 자리까지 맡으며 2만 5천 달러에 새 계약을 맺어 복귀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력 이상은 계속되었고, 그는 이 해에 간신히 3할 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볼넷을 31개밖에 골라내지 못하였다.

<1924년 베이브 루스, 타이 콥과 함께 기념촬영중인 조지 시슬러>

 

 

시슬러는 은퇴하기 직전 7년간 6번의 3할타율을 기록했지만 예전의 압도적인 기량은 다시 보여주지 못했고 1927년 27도루(stolen bases)를 기록하여 자신의 통산 4번째 도루왕에 올랐다. 1925년 그는 224안타를 쳐내고 3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다소 회복 기미를 보였으나, 이듬해에는 과거의 면모를 거의 보이지 못했다. 또한 팀도 1926년에는 7위로 추락하여 지휘봉을 잡고 있던 시슬러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1928년 브라운스는 시슬러는 워싱턴 세너터스(Washington Senators)로 트레이드했고 5월에 다시 보스턴 브레이브스(Boston Braves)로 이적했다. 보스턴에서 마지막 3년간 0.340, 0.326, 0.309 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팬들은 이미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Louis Gehrig)등이 선보인 장타의 매력에 빠져든 상태였고, 시슬러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구나 최고의 1루수라는 칭호도 완전히 루 게릭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1930년 시즌 종료후 브레이브스는 시슬러를 방출하게 되었다. 이후 2년간 마이너리그에 머물던 시슬러는 1932년 시즌종료 후 완전 은퇴를 선택하여 긴 현역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시슬러는 총 1915년부터 1930년까지 16시즌동안 2055경기에 출전했으며 통산 2812안타, 102홈런, 375도루, 0.340의 타율을 기록했고 1939년 그해 최고 득표율(85.77%)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조지 시슬러의 통산 기록, 출처 : mlb.com>

 

<193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조지 시슬러>

 

 

은퇴 후 시슬러는 1943년 오랜 스승인 브랜치 리키가 단장으로 있던 다저스로 가서 타격인스럭터와 스카우트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시슬러와 리키는 먼 훗날(1980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되는 듀크 스나이더(Duke Snider)에게 스트라이크 존 공략법에 대해서 지도했다.

 

또한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리키와 함께 흑인선수들의 영입에 앞장서서 2루수였던 재키 로빈슨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다. 1951년 브랜치 리키가 피츠버그 파이리츠 단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시슬러도 함께했으며 이번에는 파이리츠의 레전드인 로베르토 클레멘테(Roberto Clemente)에게 타격지도를 했다. 1961년 시슬러의 조언을 받고 더 무거운 배트로 바꾼 클레멘테는 그해 타격왕에 오르게 되었다.

 

2004년 10월 당시 시애틀 매리너스(seattle mariners)의 스즈키 이치로가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s)와의 경기에서 상대투수 라이언 드리즈(Ryan Drese)에게 시즌 258번째 안타를 뽑아내면서 시슬러의 최다안타 기록은 84년만에 경신되었다. 당시 경기장에는 시즐러의 딸인 프랜시스(Frances Sisler Drochelman)를 포함한 가족들이 참석하여 이치로가 아버지의 대기록을 넘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기후 프랜시스는 아버지인 조지를 대신하여 이치로의 대기록 달성을 직접 축하하였다.

<최다안타 기록 경신후 프랜시스와 이치로>